
묵은 부채의 끝에서 마주한 ‘눈길’
이청준의 《눈길》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흐르는 말로 셈할 수 없는 것의 온도를 끝내 묻는 작품이다. 소설은 ‘나’가 고향의 어머니를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다시 서둘러 떠나려는 짧은 체류를 따라간다. 표면상 사건은 미미하다. 그러나 그 미미함 속에서 독자는 오래 눌러놓았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드는 순간들을, 얼어붙은 감정의 결정이 아주 천천히 녹아내리는 시간을 목격한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서늘한 정서의 해빙기를 그린다.
초입부터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니라 ‘노인’이라 부른다. 호칭 하나가 이미 서사의 방향을 정한다. 그것은 거리두기이자 자기합리화다. 학창 시절 집안 몰락 속에 자수성가했다는 자의식은 “나는 빚이 없다”는 암묵의 문장을 만들어 주고, 그 문장은 ‘나’에게 어머니를 미지근하게 대할 권리를 부여해왔다. 그래서 ‘나’는 늘 선걸음으로 떠난다. 머물러 대화의 빚을 청산하기보다, 바쁘다는 핑계로 관계의 결산을 미룬다. 이때 아내가 중요한 매개로 등장한다. 그녀는 묻고, 들어주고, 어머니의 입을 열게 한다. 소설의 정서적 전환점은 바로 이 경청에서 시작한다.
‘지붕을 도당으로 얹고 방 한 칸을 늘이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망은 소소한 생활담처럼 들리지만, 사실 ‘나’의 거리두기 방식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장면이다. 그 말은 정서적 부채를 현금화하는 순간처럼 들린다. 그래서 ‘나’는 불편해지고, 짜증이 치민다. 이어지는 상징물 ‘옷궤’는 더 직접적이다. 새 주인의 양해를 얻어 억지로 남겨둔 그 옷궤는, 어머니가 아들을 맞을 작은 의식과 체온을 보관해온 장치다. ‘나’에게 옷궤가 “묵은 빚문서”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그 안에 어머니의 배려가 고스란히 눌어붙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안다. ‘나’가 갚지 못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 말, 머묾의 온도였음을.
절정은 어머니의 회상으로 찾아온다. 큰아들의 주벽으로 집이 팔리던 날, 어머니는 아들을 서울로 보내놓고 홀로 눈길을 되돌아온다. 아들의 발자국을 ‘몹쓸 발자국’이라 부르는 역설은 가난과 자책을 통과한 모성의 언어다. 발자국을 밟고 돌아오며 어머니가 느낀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라”는 축원이 함께 있었다. 그래서 그 눈길은 비애의 길이면서 동시에 축복의 길이다. 동네 골목으로 곧장 들어서지 못한 까닭—‘말간 햇살이 부끄러워’—도 인상적이다. 고통을 외화(外化)하는 대신 내면화해 씹어 삼키는, 한국적 모성의 미학이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작품이 남기는 질문은 단순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빚’이 있는가?《눈길》은 ‘있다/없다’의 재판을 열지 않는다. 대신 빚의 형태를 바꾸어 제시한다. 빚이란 어떤 계좌의 채무가 아니라, 시간이 켜켜이 만든 정서의 비가역성이며, 나눠 가진 고생과 꾹 눌러 둔 마음의 무게라는 것. 그러므로 화해는 청산이 아니라 감당의 다른 이름이다. ‘나’가 끝내 받아들이는 것은 어머니의 체념이 포기가 아니라 배려였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그 배려 위에서만 ‘선걸음’할 수 있었다는 역학이다.
문체의 면에서도 《눈길》은 과장이 없다. 이청준은 사건을 외치지 않고, 사소한 사물을 정성스레 배치한다. ‘옷궤’, ‘지붕’, ‘눈’, ‘발자국’ 같은 사물들이 상징으로 증발하는 순간, 독자는 설명이 아닌 감응으로 설득된다. 짧은 분량 안에 반복과 변주를 세밀하게 엮어, 독자가 스스로 결론에 다다르게 하는 서사적 절제는 여전히 현대적이다.
오늘의 독자로서 이 작품을 덮고 남는 것은 교훈이 아니라, 자세다. 더 늦기 전에 묻고, 듣고, 머무는 자세. 빚을 갚겠다는 결의보다 먼저, 함께 눈길을 한 구간이라도 다시 걸어보려는 마음. 《눈길》은 거창한 효의 윤리를 설파하지 않는다. 그 대신 식탁 위에 국을 덥히듯, 우리 일상의 온도를 반 숟갈쯤 높인다. 그리고 조용히 일러준다. 화해는 새 지붕을 얹는 공사가 아니라, 눈 녹는 소리를 서로 듣는 일이라고. 그래서 이 소설은, 겨울이 아닌 계절에 읽어도 늘 서늘하고도 따뜻하다. 오래된 ‘묵은 빚문서’를 조용히 접어 서랍에 넣게 만드는 힘—그게 《눈길》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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