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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감

[나쁜 책] 변태의 변태

by 오얏빛 2025. 11. 10.

나쁜책 금서기행 김유태

나쁜 책이 나를 순수로 밀어 넣을 때
― 김유태 『나쁜 책: 금서 기행』을 읽고

독서를 하는 것은 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고 나는 믿어 왔다. 세계나 국가, 사회에 대한 질문은 부차적이었다. 누가 어떤 배경으로 썼는지, 작가의 이력이나 화려한 추천사, 서문과 후기 따위도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책이란 오로지 본문의 시작과 끝, 그 사이에 펼쳐진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사유의 포대였다. 작가는 생산을 하고, 나는 소비자로서 그 책을 산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 책은 완전히 나의 것이어야 했다.

내가 샤프로 자를 대듯 밑줄을 긋든, 페이지를 찢어버리든, 아니면 제목조차 무시한 채 쓰레기통에 내던지든,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내(內) 소유의 영역.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펼치며, 독자로서 김유태 작가의 생각에 빠져들기를 거부하겠다고 마음속으로 선언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내 사유의 재료로만 쓰이리라,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작가의 ‘나쁜 책’에 잡아먹히다

그러나 선언은 오래가지 못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는 점점 모순이라는 늪에 빠져들었다. “오, 선언하지 말걸.”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나는 그 늪의 점성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김유태의 문장은 차갑게 논리적이면서도 동시에 묘하게 따뜻한 감성을 품고 있다. 그의 이성은 금서들을 더 날카롭게 해부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들을 더 나이브하고 인간적인 ‘나쁜 책’으로 만든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내가 그동안 붙들고 있던 독서론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오로지 ‘나’의 질문에만 몰두하며, 세계와 타인, 사회의 맥락을 의도적으로 차단해 온 것은 아니었을까. “책은 나에 대한 질문이어야 한다”는 나의 신념은, 어느새 “나밖에 모르는 독서”로 축소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한심한 박수를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 책에서 김유태는 금지된 책들, 이른바 ‘나쁜 책’들을 통해 세계와 시대,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차분히 드러낸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드러내는 것은 책이 아니라, 책을 읽는 우리 자신의 모순과 욕망이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문장은 나를 어떤 이념도 아닌, 묘하게도 ‘순수’의 자리로 몰아넣고 있었다. 저 반대편에서 금기이자 악으로 치부되던 시간으로.


순수 기억의 금기가 풀릴 때

순수 기억의 금기가 풀리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말이다. 작가의 필력에 기꺼이 굴복하기로 마음먹자, 오히려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나를 충분히 ‘나쁨’에 몰아넣고, 한 번 철저히 파괴해보자는 생각을 하니 온갖 기억들이 피어올랐다.

목차를 훑다 보니, 순서조차 깨고 싶어졌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이 대목이었다.

왜 젊은 거장은 ‘자위행위 소설’을 썼을까
― 『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400권에 달하는 한 권 전체가 A성적을 받는 천재 소년의 수음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책은 포트노이가 수음에 집착한 이유를 정신과 의사에게 고백하는 일인칭 서술로 진행된다. 온통 규범을 조롱하고 금기를 부수는 블랙 유머로 가득하다. 포트노이의 자위행위 묘사는, 소년의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 행동의 한 상징.”

이 인용문을 읽는 순간, 오래전에 감춰두고 잊어버린 줄 알았던 나의 사춘기, 나의 몸, 나의 죄의식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나의 몸을 처음 자각하던 시절

나는 한참 내 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중학교 2학년까지의 나는 그저 걷고, 뛰고, 차고, 노는 걸 좋아하던 아이였다. 모든 즐거움은 축구 시합의 스코어에 달려 있었다. 이기고 지는 숫자에 따라 흥과 분이 출렁이던 시절.

그때 나에게는 하나의 버릇이 있었다.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 기묘한 의식이었다. 엄마의 머리칼을 집게손가락에 돌돌 말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빨며 잠드는 것. 꼭 그래야만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그 버릇을 고치라는 엄마의 회초리와 손바닥을 맞으면서까지 고집스럽게 이어가던 습관이었다.

전학을 가게 되면서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했을 때는 누나의 머리칼을 대신 꼬았다. 하지만 누나는 이런 내 버릇을 빌미로 용돈과 거래하려 드는 영리한 협상가였다. 나는 그 거래를 거부했고, 머리카락 대신 내 등을 스스로 구부려 잠을 청해야 했다. 결국 나는 이모의 머리칼에 기대 잠든 날들이 더 많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겨울을 지나면서 이 버릇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공백을 채운 것은, 훨씬 노골적이고, 훨씬 혼란스럽고, 훨씬 솔직한 감각이었다.


빨간 비디오, 숲속의 나무 한 그루, 그리고 첫 죄의식

어느 겨울날, 하굣길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몰려가던 그 길을 떠올린다. 히죽거리며 따라간 친구 집에서 우리는 빨간 비디오를 VCR에 넣었다. 간호사가 병자를 다루는 장면은, 지금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미지 중 하나였다.

스크린이 꺼지고 난 뒤에도 나는 쉽게 일상으로 복귀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더 있자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집에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장면들은 머릿속에서 계속 증식했고, 그와 함께 몸 어딘가가 낯설게 반응하고 있었다.

논밭과 숲길 사이, 나무 한 그루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손가락 끝에 전혀 새로운 감각이 밀려왔다. 왕성하게 커져버린 물건을 건드릴 때마다, 흐릿한 즐거움과 설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동시에 출렁거렸다. 축구를 할 때 느끼던 흥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뇌우가 아래로 쏟아지는 듯한 감각.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나는 겨우 청바지의 질펀해진 주머니를 부여잡고, 버스에 올라탔다. 할머니와 아주머니 사이를 지나 어느 고등학생 누나의 눈과 잠깐 마주쳤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날, 나는 나의 최초의 죄의식이 탄생하는 순간을 온몸으로 겪고 있었다. 지금도 확신한다. 그 날이었음을.

그리고 이제 와 이 책을 읽으며 깨닫는다. 그때 사라진 것은 단지 잠버릇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어떤 순진한 형태의 ‘몸’에 대한 무지였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성적 자의식, 죄의식, 그리고 ‘나쁜 것’을 향한 묘한 끌림이었다.


금서가 열어젖힌 나의 ‘변태’

『나쁜 책: 금서 기행』에서 김유태는 ‘자위행위 소설’이라 불렸던 『포트노이의 불평』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단지 한 소년의 일탈이 아니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 행동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 지점에서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것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죄의식과 부끄러움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내 과거의 경험들을 다시 이름 붙이게 되었다. 예전에는 ‘변태’라고만 생각했던 어떤 장면들이, 이제는 억압과 욕망 사이에서 몸부림쳤던 한 소년의 서투른 해방 시도로 읽히기 시작했다. 김유태의 글과 아직 읽어보지도 않은 필립 로스의 소설에 기대어, 나는 내 기억을 다시 읽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책을 덮으며 한 가지 결심을 한다. “꼭 『포트노이의 불평』을 읽겠다.” 그리고 어쩌면, 그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는 또 한 번의 ‘변태(變態)’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나쁜 의미의 변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더 정직하게 마주하기 위한 변태(變態), 다시 말해 변형과 진화로서의 변태 말이다.


나쁜 책은 진짜 나를 드러낸다

『나쁜 책: 금서 기행』은 세상이 금지해 온 책들을 차례로 불러내며, 우리가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는지를 묻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동안 독서를 철저히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오던 나의 태도 속에, 또 하나의 금기가 숨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타인의 생각을 철저히 차단하고, 내 안에서만 맴도는 질문들. 결국 그 질문의 한계는 나의 한계이기도 했다.

김유태의 문장은 그런 나를 끌어내어 더 넓은 세계로, 더 깊은 내면으로 밀어 넣는다. ‘나쁜 책’은 나를 타락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진실하게 만들었다.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기억들을 다시 불러내고, 죄의식이라 불렀던 감각들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보게 만들었다.

독서란 결국, 나에 대해 질문을 하는 일이라는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다. 다만 이제 그 문장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나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 감히 묻지 못했던 질문을 끝내 던져보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로 했다. 설령 그 끝에서 또 한 번의 ‘변태’가 기다리고 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