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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감

남현정 작가 소설 그때 나는 BY 아다지오아사이

by 오얏빛 2025. 7. 6.

아다지오아사이-남현정

 

그때 나는 산꼭대기에 서 있었다.

 

 

> 첫 문장부터 쉽게 떠오른 이가 있었다. 시시포스. 나는 나를 죄인으로 확정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간다. 죄를 지음으로써 생의 생을 느끼며 살아간다. 산다. 는 것에 지쳐 눈물을 쏟았다. 때론 죽고 싶은 마음도 생을 느끼게 해 주었다. 죄는 곧 사랑으로 치환되는 극적 생명력을 얻는 시점으로 나를 생의 생활로 돌려 보내기도 하였다. 그곳은 역시나 공포의 공포며 익숙한 공포가 되어 더이상 공포가 되지 않는 절벽을 품은 산꼭대기... 와도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산의 꼭대기에 도착한 그를 상상하는 것이다. 내려갈 일을 생각하며 힘들었던 굴림을 잊고, 내려가면서 다시 굴려 올림을 생각할 두려움과 공포에 가까워지는 희망과 절망이 혼재된 약속된 산. 그곳은 영원히 생의 생을 밀어올림으로 내 생을 압축하고 죽지않는 나의 죄는 생을 함축하는 죽음으로 나를 인도할 것이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없는 장대를 기어오르는 머리 없는 한 존재를 나는 저기 바라본다
어디에서 들리는 걸까? 이 목소리는 환청일까?
산보하는 동안 휴실을 취할까 하고 비록 아무리 바라도 거기에 다다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그토록 다다르기 어려운 그 휴식의 밑바닥에 다다르려고 애를 쓰며 산보를 하는 동안 나는 저기 바로 그를 알아본다
아니다. 이것은 환청이 아니다.

> 그 공포가 무엇일까 생각하다 고독을 떠올리고 외로움을 추어 올린다. 방의 단칸에서 단칼로 자결해도 세상과 아무런 관련없을 몸뚱아리로 침대에 누워 침잠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문득,

환청이든 실청이든 '없는' 것이든 무형에 가까운 생각의 덩어리가 나의 형체를 고스란히 담는다. 홀로 상승하는 기운으로 기쁜 마음이 가쁜 숨을 만들어 내 몸까지 부웅 뜨게 하여 일으켜 다시 이 책을 잡는다. 휴식을 하려다 갑자기 '없는' 얼굴이 만들어 진다. 새가 날아와 없는 목 위에 내려 앉아 둥지를 짓고, 없는 정체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만들어진 하찮은 나의 표절된 상상력. 하나의 간음과도 같은 죄를 또 짓고 마는구나. 정신을 가다듬고 나만의 상상력을 이어나가자. 과거의 돌이 과거의 돌멩이 조각까지 몰고 쳐들어 온다. 파도다... 그것은 하나의 죄의 파도다. 매몰차게 몰고온다.

 


지치지 않고 오 아니다 그는 무겁게 지쳐 있다 끊임없이 그는 기어오른다그 무시무시한 수직의 길을 기어 올라간다
*앙리 미쇼,[끊없는 장대에]

 

> 그래도 나는 끊임없이 상상해 댄다. 삶의 굴레 속에 크나크게 차지한 '죄'의 장대에 매달려 생에 애걸복걸하는 위대한 나의 '죄'의 소재로 끝없이. 과거는 비열하게, 처참하게 그러나 미래는 희망차게, 즐거웁게. 무릎이라도 꿇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장대에 의존할지어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잠잠함에 빠져 들어 하산을 하자.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 이러한 물음은 '없는' 나를 다시 죄로 있게 한다. 역시 나는 그 끝없는 장대 위로 도망쳐야 했다. 내 유일한 즐거움은 오로지 생각과 상상력. 죄가 치환되는 시간에 어둑한 줄거리의 종말이 스며들었다. 공포의 공포가 잦아들지만, 안다. 곧. 종말의 끝은 시작이란걸. 애초에 끝이란 것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죽기 전 30초 정도 더 살았습니다."

> 켈켈. 그 숫자에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낀다. 나는 벌써 그 30초를 이미 썼고, 기다린다 죽음을. 43년이 지나고 있다 죽기 전이다

 

겉으로 보기에 삶은 죽음으로 쉽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최후의 30초로 인해 산 자는 죽은 자의 세계로 절대 쉽게 넘어갈 수 없다.

 

> 내 죽기 전 30초를 마치 43년 만큼 늘어뜨린 것은 아닌가. 내 상상의 길이는 이 공간과 전혀 상관이 없단 말인가. 오로지 시간을 갉아내어 내 삶의 비탈길을 만들어 저 산꼭대기로 올리고 내리는 것이 아닌가. 내 삶은 이미 죽음으로 넘어가고자 하는데 왜 넘겨 줄 수가 없는가 여전히. 딱지를 쳐 올리듯 반대편의 면만을 내보이면 되는 것 아닌가? 나를 신이 만들었다면, 나의 존엄이 명확하다면, 이 짓을 반복하는 저 신의 죄는 왜 따지지 못하는 건가? 어랏, 신의 죄를 따지다니 무엄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갑자기 내 삶이 존엄해 짐을 느낀다.

 

붉은머리새의 죽음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위선을 확인하다 끔찍한 기분을 느끼는 화자의 모습에서 혼란과 무질서를 일으키는 상상력의 위대함을 알아챈다. 허나, 그것은 죄다. 죄다 죄이다. 내 삶을 옥 죄는 끔찍한 죄.

 

나는 그것을 있는 힘껏 멀리 던졌다.

 

>다시 돌아올 줄 명확히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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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나는 '죄'의 삶 속에서 나를 죽이고 재생하였다. 그것은 상상과 현실, 그리고 얼키고설킴의 이야기였지만. 상당히 자극적이어서 생의 생을 낳는다. [그때 나는] 이란 작품 속에는 오로지 '나'로서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게 한다. 그 힘의 원천은 상상력이며 죄와 사죄 그리고 극복이 가능하다면 사면까지도 가능하여 '나'를 존엄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종말은 또다시 나를 상상의 세계로 빠지게 하여, 간음과도 같은 죄로 빠트린다. 그래서 나는 '산꼭대기'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있을 시시포스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내일 또 죄를 굴린다... 이야기처럼...